폄) 결핵 환자 아버지 패티슨 “한국에서 삶, 가장 귀했던 시간”
결핵 환자 아버지 패티슨 “한국에서 삶, 가장 귀했던 시간”
1966년~1982년 국립마산병원 소아결핵병동서 진료
마산 가포동 살며 척추결핵 환자 4만 명 몸, 마음 치료
아내 오드리 여사, 마산 임신부 도와 아기 30명 받기도
32년 만에 마산 찾아 회고..."옛날 돌아가도 같은 선택"
"마산에서 의료 봉사를 한 시간은 제 생에 가장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대학생으로 돌아간대도 한국, 마산으로 의료 봉사 가겠다는 선택을 주저 없이 할 것입니다."
'결핵 환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인 의사 피터 패티슨(한국명 배도선·88) 씨는 1966년 12월부터 1982년 2월까지 16년 동안 국립마산병원에서 소아결핵병동 책임자로 일하며 환자 4만 명을 돌봤다. 한국명 '배도선'은 '패티슨'을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환자들에게 부르기 쉽도록 친숙하게 지은 이름이다.

배도선 씨는 영국 런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어려운 길을 택했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교 의과대학 재학 중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됐고 도움이 필요한 나라로 봉사하러 가겠다고 다짐했다.
부모님은 아들의 다짐을 이해하지 못하며 연을 끊었다. 집에서 쫓겨난 배도선 씨는 간호사 '오드리 다우'와 결혼한 후, 다짐을 실천하고자 1966년 한국으로 향했다.

배도선 씨가 기억하는 가포동 첫인상은 아름답고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앞에는 바다, 뒤에는 산이 있는 가포동은 제게 제2의 고향입니다. 대한금속 버스를 타고 마산에서 광주, 목포, 대구 등으로 떠나 진료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마산 사투리 '계시소이'라고 인사 건네던 주민들의 모습도 기억납니다."
배도선 씨는 기억을 더듬으며 한국말을 했다. 발음은 어눌했지만 '김치를 먹으면 한국말을 다시 잘 할 것 같다'는 농담도 건넸다.

배도선 씨는 책임자로 일했던 국립마산결핵요양소 소아결핵병동은 전국에서 온 환자로 붐볐다. 환자들은 걸을 수 없어 리어카, 지게, 보호자 등에 업혀왔다. 병상에 누워있던 아이들은 6~12개월 치료를 받고 걸어나갈 수 있었다.
그는 마산병동에 오는 환자뿐만 아니라 전국 진료소를 찾아갈 정도로 혼신의 힘을 쏟았다.
"아침 일찍 버스 타고 오후 전남 목포에 도착해 진료를 본 후 이튿날 오전 마산에 돌아왔습니다. 너무 멀어 오기 힘든 환자가 있다면 기꺼이 찾아갔습니다."
척추결핵 환자뿐만 아니라 가난 탓에 치료받지 못한 이들의 몸과 마음도 보살폈다. 배도선 씨는 한 환자를 기억했다.

배도선 씨는 그 환자를 계속 돌보며 신앙도 전파했다. '왕아줌마'는 낫지 못했지만, '이 땅에서는 걷지 못하더라도 하늘에 가서는 걸을 수 있겠다'고 마음먹으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그의 옆에는 '내 오른손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로 든든한 조력자 이종섭 물리치료사가 있었다. 척추결핵 환자였던 이종섭 씨는 결핵 치료를 받은 후, 병동에서 물리치료사로 활동하면서 신앙도 얻었다. 하루는 이 씨가 '내가 잘못한 게 많다'며 병원 물건을 훔친 적 있다고 말했고, 고백을 들은 배도선 씨는 그를 더욱 신임하며 중요한 역할을 함께 해나갔다.

"정말 감사하게도 1980년대 들어 한국의 결핵 환자 상황이 좋아졌습니다. 이 기간 의학 연구 사업도 마무리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연스레 한국을 떠날 날이 다가왔음을 직감했습니다. 가포동 마을에서 '마지막 굿바이'하는데 인사하는 이마다 발걸음을 멈추고 울던 기억이 납니다."

"가포동으로 가 옛날 진료보던 장소를 찾았습니다. 옛 직장 동료 이종섭, 윤영옥, 김희순, 김정순, 제용순, 김명희 씨 등을 만났는데 오랜만의 만남에 벅차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참 많은 인연을 얻었습니다. 내 생애 둘도 없을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이렇게 환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배도선 씨에게 다시 대학 시절로 돌아간대도 같은 선택을 할 거냐고 묻자, 그는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Of course!(오브 콜스·물론이죠!)"
/안지산 기자